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104

열정 - 김은영

열정 담쟁이 새잎처럼 사랑이 줄을 탑니다 우리들 아련한 가슴이 맞닿아 저려와도 잡은 손 놓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이 울고 있지만 볼 수가 없음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시작이라 말 한적 없으므로 끝 또한 없겠지요 다만 몇 억겁 전부터 지어졌던 인연을 따라 갈 뿐입니다 운명이 길을 내면 앞선 그 뒤를 기쁜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가는 내내 웃음 잃지 않아 행여 그가 뒤를 돌아보는 의심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 길을 다 지나 험한 길 어떻게 왔냐고 물으면 반듯한 어깨만 보고 따라 왔다 말 할겁니다

보조바퀴 - 전남진

보조바퀴 보조바퀴를 뗀다 바퀴보다 더 많이 구른 바퀴 쓰러지는 바퀴를 세우던 바퀴 쓰러지는 바퀴 대신 상처를 받아낸 바퀴 만난 길이 모두 상처가 된 바퀴 그래서 모든 길이 문신이 된 바퀴 상자에 담긴다 두발로 탈 수 있다며 보조바퀴를 떼 달라고 아이들이 떼를 썼지만 나조차도 모를 이유로 떼지 않았던 보조 바퀴 오늘 뗀다 뗀 자리 깨끗한 새살이 눈부시다 보조 바퀴를 뗀 자전거를 타고 아이들이 달린다 전보다 빠르게 달린다 이젠 거추장스러워진 보조 바퀴를 떼고 두 발로 더 빨리 달린다 나를 받치던 보조 바퀴 아주 오래된 이미 쓸쓸해진 보조 바퀴 나를 키운 그 자리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린다 보조 바퀴였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사실도 잊은 채 기다린다 그 바퀴 뗀 자리 아직 환한데 이제 더는..

한 켤레 운동화 - 길상호

한 켤레 운동화 저녁밥을 지으면서 어머니는 새하얗게 솔질한 운동화 부뚜막에 올려 놓았다 그때부터 운동화는 가마솥의 귀처럼 붙어서 불과 물 사이 새 싹의 꿈 태우고 밥으로 태어나는 쌀들의 빨라지는 맥박소리 들었을 것이다 무쇠 솥 뚜껑 사이를 비집고 흐르던 그 뜨거운 아우성 보았을 것이다 가끔은 너무 바짝 귀를 댔다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에 데기도 했던 운둥화 잠시 뜸을 들이며 싸들 호흡을 정리할 때 젖은 몸 생의 열기로 말라가던 운동화 사람의 하룻밤이 왜 따뜻했는지 사람이 허기가 어떻게 가라 앉는 것인지 운동화는 부뚜막에 앉아 들었을 것이다 나의 길 발 지문으로 새겨 놓고 지금은 늙은 어머니처럼 구석에 버려진 어린 시절의 저 운동화 한 켤레

서가(序歌) - 이근배

서가(序歌) 가을의 첫 줄을 쓴다 깊이 생채기 진 여름의 끝의 자국 흙탕물이 쓸고 간 찌꺼기를 비집고 맑은 하늘의 한 자락을 마시는 들풀의 숨소리를 듣는다 금실같은 볕살을 가슴에 받아도 터뜨릴 껓씨 하나 없이 쭉정이 진 날들 이제 바람이 불면 마른 잎으로 떨어져 누울 나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과 산다는 것의 뒤섞임과 소용돌이 속에서 쟁한 푸르름에도 헹궈지지 않는 슬픔을 가을의 첫 줄에 쓴다

둥근 반지 속으로 - 이사라

둥근 반지 속으로 봄볕이 내려 앉는 창가에서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인 듯 한 사람인 듯 눈동자 속에 집 한 채 짓고 눈빛 속에 눈물 속에 눈뜬 꿈 둥글게 두고 싶다 둥근 세상과 한 몸으로 철철이 물들어 눈 밖에 나는 일 없으면 좋겠다 딱딱한 것 깨고 나와 알고도 모르는 척 다시 세상 살면서 온 마음이 온 마음에게 부딪쳐도 즐겁게 쓸리는 여느 봄날같이 가지 끝이 연륜이 가벼울수록 팔랑팔랑 안타까운 봄날같이 이렇게 둥근 눈으로 마주 보며 말 못하고 피 마르는 고통도 오래 될수록 씨눈 된다는 말, 이제 믿는다 사랑은 말없이 둥글다며 누구나 말없이 단풍 들고 낙엽 지고 누구나 말없이 봄볕들고 새순 돋는다는 말, 정말 믿는다 둥글게 세상 담은 반지 속으로 사람들 자꾸 들어 간다

멍요일 - 박남희

멍요일 오늘은 멍요일이다 어젯밤 말 안 듣는 아들을 심하게 때리고 내 가슴에도 멍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들 종아리에 난 멍자국을 들고 파주 낙원공원묘지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다 그동안 나를 키우시며 멍들었을 아버지의 멍자국을 만져보러 간다 무덤 위에는 어느새 풀들이 무성하다 바람은 무덤위의 풀을 흔들고 자꾸 내 마음을 흔들어 댄다 바람 속에 까칠한 멍자국이 보인다 세상에서 흔들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게 더 이상 흔들리지 말라고 붙잡다가 생긴 멍자국을 가지고, 저 바람은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