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淵寺(각연사) 오디 - 서석조 覺淵寺 오디 주지 스님, 죄 하나 슬쩍 짓고 들왔습니다 비로전 앞뜰의 저 뽕나무 말인가요? 바람에 흔들리거나 사람에 흔들리거나. 오디는 익었으니 제 갈 데를 간 것이고 보살의 배 안에서 열반을 하겠으니 그 누가 주인인가요 그냥 보고 있었지요.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6.07.11
건널목 건널목 어스름 저녁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잠시 멈춘다 건널목, 빨간 신호등이다 가쁜 숨 한 박자를 쉬면서 목덜미에 얹히는 찬바람을 단속하고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긴 시간이다 그리움도 生의 한 신호등이라면 내 그리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이다 너에게 .. 시와 시조/바람의 소리 이후의 詩 2016.02.29
두물머리의 작은 이야기 두물머리의 작은 이야기 세상이 온통 눈밭으로 변한 어느 날 아침 양평 두물머리의 새하얀 눈밭 위 희미한 점점으로 남아있는 비틀거린 발자국의 끝 꽁꽁 언 채로 화강암 돋을새김만큼이나 딱딱해진 작은 목숨 한때는 아름답게 반짝였을 깃털 위에 층층이 쌓인 하얀 침묵 강변 마른 풀 .. 시와 시조/바람의 소리 이후의 詩 2016.02.20
동짓날, 통도사 동짓날, 통도사 절 마당 한 모퉁이, 늙은 배롱나무 한 그루 시간이 멈춘 듯 온 몸에 이끼를 두르고 있다 배롱나무 한 生의 외투인 것이다 언젠가의 날에 저 마저도 내려놓을, 어리석은 중생이 나무의 生을 들여다본다 한 벌 외투 밖으로 삐져나온 여린 가지마다 來生이 여물고 있다 더운 .. 카테고리 없음 2015.03.02
수치포구 - 문인수 수치포구 만(灣), 등이 휘도록 늙었으나 우묵한 가슴엔 군데군데 섬이 씹힌다. 질긴, 질긴 해소기침을 문 파도소리에 또 새벽은 풀려서 연탄가스 냄새 나는 색깔이다. 푸르스름한 풍파의 주름 많은 남루, 때 전 한이불 속 발장난치며 들썩대며 킬킬거리다 가랑이 서로 뒤얽힌 채 밤새도록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5.02.28
이승선, 어둠 속의 한 줄기 빛 같은 분 이승선씨, 고층건물에 간판을 다는 일을 하는 분이다. 며칠 전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 화재가 났을 때 가스배관을 타고 8층까지 올라가 직업상 가지고 있던 밧줄로 불과 연기에 갇힌 주민 10명을 구한 분이다. 자신의 위험을 아랑곳 하지 않고 밧줄로 주민들을 땅으로 매달아 무사히 살렸다.. 이런저런 일/그저 한 마디 2015.01.18
悲歌(비가) - 이제인 悲歌 너를 안았던 손으로 다시 너의 마지막 길을 수습한다 일상처럼 너의 겉옷을 벗기고 피 묻은 속바지를 벗긴다 (…) 첫날밤 그 떨리는 손길로 나를 향한 너의 미소도, 기도 소리도 너와 나의 못 다한 고백마저도 차곡차곡 접어 노잣돈으로 네 손에 꼭 쥐어준다 (…) 나의 손을 가만히 잡..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
결에 관하여 - 조창환 결에 관하여 나무에만 결이 있는 게 아니라 돌에도 결이 있는 걸 알고 난 후 오래된 비석을 보면 손으로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돌의 결에 맞추어 잘 쪼아낸 글씨를 보면 돌을 파서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글자를 끌어안고 돌의 결이 몸부림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기억들,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
치마 - 문정희 / 팬티 - 임보 치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