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淵寺(각연사) 오디 - 서석조 覺淵寺 오디 주지 스님, 죄 하나 슬쩍 짓고 들왔습니다 비로전 앞뜰의 저 뽕나무 말인가요? 바람에 흔들리거나 사람에 흔들리거나. 오디는 익었으니 제 갈 데를 간 것이고 보살의 배 안에서 열반을 하겠으니 그 누가 주인인가요 그냥 보고 있었지요.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6.07.11
수치포구 - 문인수 수치포구 만(灣), 등이 휘도록 늙었으나 우묵한 가슴엔 군데군데 섬이 씹힌다. 질긴, 질긴 해소기침을 문 파도소리에 또 새벽은 풀려서 연탄가스 냄새 나는 색깔이다. 푸르스름한 풍파의 주름 많은 남루, 때 전 한이불 속 발장난치며 들썩대며 킬킬거리다 가랑이 서로 뒤얽힌 채 밤새도록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5.02.28
悲歌(비가) - 이제인 悲歌 너를 안았던 손으로 다시 너의 마지막 길을 수습한다 일상처럼 너의 겉옷을 벗기고 피 묻은 속바지를 벗긴다 (…) 첫날밤 그 떨리는 손길로 나를 향한 너의 미소도, 기도 소리도 너와 나의 못 다한 고백마저도 차곡차곡 접어 노잣돈으로 네 손에 꼭 쥐어준다 (…) 나의 손을 가만히 잡..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
결에 관하여 - 조창환 결에 관하여 나무에만 결이 있는 게 아니라 돌에도 결이 있는 걸 알고 난 후 오래된 비석을 보면 손으로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돌의 결에 맞추어 잘 쪼아낸 글씨를 보면 돌을 파서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글자를 끌어안고 돌의 결이 몸부림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기억들,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
치마 - 문정희 / 팬티 - 임보 치마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하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8.02
밥풀 - 권영상 밥풀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 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다시 되돌아보아도 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4.04.15
두 마리 물고기 - 박연준 두 마리 물고기 어린 시절 목도한 부모의 교합 장면은 지느러미를 잃은 두 마리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 같았다 방은 어둡고 습했다 두 마리 물고기는 괴로워 보였고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조용한 가운데 모아지는 호흡 소리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낯선 움직임이 무언가..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3.10.26
짧은 얘기 - 이진명 짧은 얘기 자빠진 빗자루를 바로 세우니 마당이 쓸고 싶어졌습니다 마당을 쓸고 나니 물을 뿌리고 싶어졌습니다. 물을 뿌리고 나니 마루턱에 앉아 슬리퍼 바닥에 박힌 돌을 빼내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제 곳이 아닌 곳에 자빠져 있는 마음을 일으키면 바로 세우면 그러나 마음 이미 너무 비뚤어져 화만 낼지도 싸움꾼처럼 덤비기만 할지도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3.06.29
물의 처녀 - 문정희 물의 처녀 붉은 물이 흐른다 더 이상은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린 두 다리 사이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문 연다 치욕 중의 치욕의 자태로 참혹한 죄인으로 죽음까지 당도한다 드디어 다산(多産) 처녀의 속살에서 소혹성 같은 한 울음이 태어난다 불덩이의 처음과 끝에서 대지모(大地母)의 살과 뼈에서 한 기적이 솟아난다 지상에 왔다가 감히 그 문을 벼락처럼 연 일이 있다 뽀얀 생명이 흐르는 부푼 젖꼭지를 언어의 입에다 쪽쪽 물려 준 적이 있다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3.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