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104

밥풀 - 권영상

밥풀 밥상을 들고 나간 자리에 밥풀 하나가 오도마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바깥을 나가려든 참에 다시 되돌아보아도 밥풀은 흰 성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바쁜 발걸음 아래에서도 발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밟히면 그 순간 으깨어지고 마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도 없이 이 아침, 분주한 방바닥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 어린 성자의 얼굴로

짧은 얘기 - 이진명

짧은 얘기 자빠진 빗자루를 바로 세우니 마당이 쓸고 싶어졌습니다 마당을 쓸고 나니 물을 뿌리고 싶어졌습니다. 물을 뿌리고 나니 마루턱에 앉아 슬리퍼 바닥에 박힌 돌을 빼내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제 곳이 아닌 곳에 자빠져 있는 마음을 일으키면 바로 세우면 그러나 마음 이미 너무 비뚤어져 화만 낼지도 싸움꾼처럼 덤비기만 할지도

물의 처녀 - 문정희

물의 처녀 붉은 물이 흐른다 더 이상은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린 두 다리 사이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문 연다 치욕 중의 치욕의 자태로 참혹한 죄인으로 죽음까지 당도한다 드디어 다산(多産) 처녀의 속살에서 소혹성 같은 한 울음이 태어난다 불덩이의 처음과 끝에서 대지모(大地母)의 살과 뼈에서 한 기적이 솟아난다 지상에 왔다가 감히 그 문을 벼락처럼 연 일이 있다 뽀얀 생명이 흐르는 부푼 젖꼭지를 언어의 입에다 쪽쪽 물려 준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