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104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몰 몰려가는 무서은 검은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나무에 푸른이끼를 거쳐서 옛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수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굴비 - 오탁번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 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 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잠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이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각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푸른 밤 - 나희덕

푸른 밤 너에게롤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아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너에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연잎에 고이는 빗방울처럼 - 이홍섭

연잎에 고이는 물방울처럼 연잎에 고이는 물방울 처럼 나 그대에게 스밀 수 없네 경포호수를 다 돌아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빗방울 굵어지고 연잎은 하염없이 깊어가네 나 방해정(放海亭) 마루에 홀로 서서 불어나는 호수를 바라보고만 섰네 스밀 수 없는 그대 사랑 내 가슴을 열어 출렁이는 호수를 다 쏟아내어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나 이제 야위어 호수에 잠기네 나 이제 야위어 호수에 잠기네

낙수 - 조정인

낙수 느리게 구르던 수차가 덜컹, 깊은 바큇자국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동안 이곳은 늪지입니다 전선에 맺힌 빗방울 하나가 저에게 다가오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수밀도 익어가듯 깊어갑니다 말갛게 바닥을 탐색하던 빗방울이 깜박, 저를 놓으며 온몸에 찰나의 광휘를 두릅니다 빗방울이 제자릴 찾는 데는 삼천년이 걸린다는데 삼천년 너머, 빗방울 하나가 허공에 떨고 있었을 그날에도 하늘은 저리 푸르렀을까요? 연일 소소한 바람이 많아진 비 갠 오후 흰 종이 위에 ㅡ종일 나뭇잎이 웅성거린다, 적었습니다 깊어진 여백으로 물푸레나무가 들어섭니다 다 셀 수 없는 마음입니다 [

조금씩 이상한 일들 4 - 김경미

조금씩 이상한 일들 4 입관실에서 사과에서 녹내 나던 저녁, 한 사람의 숨이 멎었다 멎고 보니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숱한 끈과 붕대와 마개로 돌아간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신의 무엇이 두려워 저토록 묶고 감고 메우고 막는 것일까 마지막 두 발 하염없이 묶일 때 화장실에 달려가 가슴끈을 풀었다 창 너머 칸나꽃이 크고 붉고 동물 같았다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원시(遠視) - 오세영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