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104

그릇에 관하여 - 윤성택

그릇에 관하여 얘야, 그릇은 담아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인생살이란다 어머니의 손은 젖을 대로 젖어서 좀처럼 마를 것 같지 않다 젖은 손을 맞잡고 문득 펴 보았을 때 빈 손바닥 강줄기로 흐르는 손금 긴 여행인 듯 패여 왔구나 접시들은 더러움을 나눠 가지며 조금씩 깨끗해진다 헹궈낸 접시를 마른 행주로 닦아내는 어머니의 잔손질, 햇살도 꺾여 차곡차곡 접시에 쌓인다 왜 어머니는 오래된 그릇을 버리지 못했을까 환한 잇몸의 그릇들 촘촘히 포개진다 나도 저 그릇처럼 닦아졌던가 말없이 어머니는 눈물 같은 물기만 정성스레 닦아낸다 그릇 하나 깨끗하게 찬장으로 올라간다

비빔밥 - 고운기

비빔밥 혼자일 때 먹을거리 치고 비빔밥만한게 없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였을까 함께 섞여 고추장에 적절히 버물려져 기꺼이 한 사람의 양식이 되러 간다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여 나 또한 어느 큰 대접 속 비빔밥 재료인 줄 안다 나를 잡수실 세월이여, 그대도 혼자인가 그대도 내가 반가운가

섬말 시편 ( 잎 ) - 김신용

섬말 시편 (잎) 아무도 없는 새벽의 강가에 선다. 고인 듯 흐르는 강물은 저 혼자 흐르고, 수면 위에는 희미한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저 고인 듯 흐르는 흐름의 속삭임은, 갈대의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겠지만, 새들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갈대밭도 적막 한 채 짓고 미명 속에 잠겨 있다. 이 고요는 적막의 문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여서, 내가 한 잎으로 돋아나야만 흐름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아, 발소리도 죽인 채 가만히 새벽의 강가에 서면, 내 그림자도 물 위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처럼 수면에 젖는다. 이 혼융은,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눈빛을 지니고 있어, 몸 낮춘 것들의 흐름이 물결무늬로 어룽져 와 그 흐름이 가 닿는 소실점도 갈대의 눈시울에 젖는다. 어쩌면 저 갈대의 흔들림 속에도 아름드리 ..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성택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 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너를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 자리였노라고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 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 류근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슬픔답게 껴안을 수 있는 일 아픔을 아픔답게 앓아낼 수 있는 일 ​ 먼 길의 별이여 우리 너무 오래 떠돌았다 우리 한 번 눈 맞춘 그 순간에 지상의 모든 봄의 꽃 피었느니 ​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푸른 종 흔들어 헹구는 저녁답 안개마저 물빛처럼 씻어 해맑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일 ​ 사랑 때문에 사랑 아닌 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일 ​ 이제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을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울돌목 - 문숙

울돌목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가슴에 박혀 암초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이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