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말 시편 (잎)
아무도 없는 새벽의 강가에 선다. 고인 듯 흐르는 강물은
저 혼자 흐르고, 수면 위에는 희미한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저 고인 듯 흐르는 흐름의 속삭임은, 갈대의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겠지만, 새들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갈대밭도 적막 한 채 짓고 미명 속에 잠겨 있다. 이 고요는
적막의 문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여서, 내가 한 잎으로
돋아나야만 흐름의 속삭임이 들릴 것 같아, 발소리도 죽인 채
가만히 새벽의 강가에 서면, 내 그림자도 물 위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처럼 수면에 젖는다. 이 혼융은,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눈빛을 지니고 있어, 몸 낮춘 것들의 흐름이
물결무늬로 어룽져 와 그 흐름이 가 닿는 소실점도 갈대의
눈시울에 젖는다. 어쩌면 저 갈대의 흔들림 속에도 아름드리
적막을 베어 넘기는 벌목의 바람이 묻어 있으리 - 베어 넘긴
적막으로 뗏목을 만들어 세찬 여울을 타고 흐르는, 숨결도
묻어 있으리 - 그래, 자신의 심장을 스스로 꺼내 볼 수는 없겠지만
강바닥에 가라앉은 돌의 눈빛으로 몸을 낮추면, 저물어서
뉘어 놓았던 마음들도 저 흐름의 결대로 흘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도 이 새벽, 아무도 없는 강가에 혼자 툭 돋는다
제 심장을 제가 꺼내볼 수는 없겠지만. 마치 榾木(골목)에서
버섯이 돋아나듯, 그렇게 한 잎으로 툭 돋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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