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앉아 참새처럼 말을 쏟아내는 딸을 보니 문득 딸이 태어나던 날이 생각난다.
딸의 생일은 양력 1월인데 태어나던 해의 음력으로도 1월이다. 설 연휴 중의 저녁에
산통이 있어 병원에 갔는데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태어났다. 스피커에서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산실 앞에 갔더니 간호사가 포대에 새 생명을 안고 왔다.
아기와 처음 대면할 때 손발이 가늘고 덩치도 작아 보여 ‘딸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기를 보고 있는 짧은 시간에 간호사가 무슨 말인가 했는데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기와 산모의 상태와 보호자의 다음 행동에 대해 설명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의 성별을 확인 해줄 때의 간호사의 행동은 기억에 남아 있다.
‘아들입니다, 딸입니다’를 말해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무슨 마음이었던지 말없이 아랫도리를
살짝 들추어 보이곤 빠르게 돌아서서 가버렸다. 무심결에 한 행동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보호자가 젊게 보여 첫 아이로 딸을 얻은 것이라 지레짐작 하고 보호자가
실망하는 모습을 볼까봐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조금 우습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아들, 딸 구별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산실 앞에 있어 보면
아들을 안고 나오는 간호사와 딸을 안고 나오는 간호사의 작은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태어날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한 부모의 공통된 마음.
아내가 의사에게 성별을 물어봐도 웃으면서 ‘낳아봐야 알지’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 속에 살짝 묻어있는 느낌으로 또 뱃속에서 태아가 노는 상태로 보아 ‘딸인 것 같다’
라는 아내의 말에 나도 그렇게 예상을 하였다. 간호사의 지레짐작대로 딸이어서 섭섭한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딸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에 마음이 묘했다. 마음 한 구석에 아들을 원하는
마음이 숨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딸을 키우면서 겪을 낯설고 색다른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딸이 태어남으로 해서 우리 집에 여자 가족이 처음으로 생겼다.
물론 십여 년 전에 결혼한 아내도 틀림없는 가족이니 처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집안으로 봐서는 아내는 결혼으로 가족이 된 것이고
혈연적으로는 남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내는 중간에 가족이 되었고 딸은 처음부터
가족이 되었으니 출발점의 차이도 있다.
한 집안에서 태어나 각자 분가할 때까지 나는 삼형제의 맏이로 자랐고 결혼한 후에 태어난
첫 아이가 아들이니 처음으로 여자가 내 가족이 되었다고 말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느낌. 아마 그 느낌 속에는 미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부터 딸은 애를 태웠다. 아들을 키울 때와는 다른 낯선 경험의 시작인가?
12년 만의 출산인데다 산모의 나이 역시 적은 편은 아니어서인지 모유의 양이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아기가 젖을 잘 빨지 않은 탓에 그만 모유가 말라버렸다. 별 수 없이 우유를 먹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마저 잘 먹지를 않았다. 우유 종류를 바꾸어도 젖병꼭지를 달리해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조금 먹은 듯하면 설사를 계속 해버리고.
임신 했을 때 산모답지 않게 아내의 먹는 양이 적어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그 탓에 아기가
작은 배를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임신한 그 해에 사과가 풍년이어서 산모가
사과만 비교적 자주 먹었을 뿐이다.
아들을 가졌을 때는 밥통이나 대접이 아내의 밥그릇이었다. 이러다 아기가 영양실조라도
걸릴 것 같아서 병원에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의사로부터도 ‘별 이상이 없다’는 말과 ‘빨리
커서 죽이라도 먹는 수밖에....’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먹어야 클 것이고 죽을 먹고 안 먹고는 그 다음의 문제 아닌가?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뻥튀기처럼 커져서 죽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것저것 먹이려고 시도 해보았지만 도통 먹지를 않았다. 겨우 과일즙과 멀건 밥물만 조금
먹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정도라도 먹지 않았다면 진짜 큰일 날 뻔 했을 것이다.
제 오빠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유든 우유든 과일즙이든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양껏 먹고
소화해내며 컸다.
지금은 딸이 우유도 잘 마시고 식성도 까다롭지가 않다. 요즘 아이답잖게 김치를 좋아하고
쌈 종류와 된장을 좋아한다. 김치는 남매간에 공통적으로 좋아하는데 아들은 소풍 갈 때 김밥
대신에 김치 볶음밥을 가져갔다.
그렇게 먹지 않고 애를 태웠는데도 불구하고 걱정과는 달리 별 탈 없이 커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른과는 달리 아기는 자기 몸에 맞는 양생법으로 스스로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장거리는 아기의 걸음마로
조용하던 골목이 와글거린다
엄마는 어떻게 아기의 몸속에
자기를 저렇게 새겨 넣을 수 있었을까
무릎 꿇어 까꿍, 팔 벌리는 엄마 품속으로
아기는 무작정 몸을 허문다
강아지 한 마리 꼬리를 흔들자
눈 맞추며 천년 쯤 살았던 사람들처럼
아기는 강아지를 향해 뒤뚱 기운다
강아지는 어떻게 소리도 없이
아기의 몸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을까
-손현숙, ‘아기와 눈을 맞춰’ 중에서-
오빠와 달리 몸매도 가늘고 조용하게 자라더니 조금씩 말을 배울 때쯤부터는 제법 당찬 면도
있고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욕심과 적극성도 있었다. 제 고집에 못 이겨 네 살 들어서자 한글
학습지를 받았는데 말 배우자 글 익혔다 싶을 만큼 또래 보다 비교적 빠른 나이에 한글을
익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 우리 언제 봉지집에 자러 갈 거야?’ 하고 묻는다.
처음 듣는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봉지집? 그게 무슨 집인데?’ ‘그거 있잖아....’ 조그만 입으로
열심히 설명하는 것을 듣고 난 뒤에야 봉지집이 무엇인지 알았다.
매년 여름휴가 때가 되면 가족들과 주로 계곡을 찾아 야영을 한다. 아기를 데리고 야영할
수는 없어서 한 2년 쉬었다가 세살 때쯤 처음으로 데려 갔었다. 그 기억이 딸에게 진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텐트’란 말을 모르는 딸이 자신이 알고 있는 낱말을 조합해서 ‘봉지집’이란
새 낱말을 만든 것이다.
‘봉지집’이라...., 설명을 듣고 한참을 웃었지만 그것 참 그럴 듯 한 말이었다. 요즈음도 가끔
식구들끼리 ‘봉지집’에 대한 일을 입에 올린다. 하고 싶은 말을 상황에 맞게 표현할 만큼 말이
늘었을 때쯤 장난삼아 묻는다. ‘영경이는 나중에 커서도 시집가지 말고 엄마, 아빠와 오래
오래 같이 살자. ’‘응, 영경이는 엄마, 아빠와 같이 살거야’시집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의 당연한 대답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할 때쯤 또 묻는다. 그래도 아빠, 엄마와 같이 산다는 대답이 나온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제 엄마와 아빠는 원래 그렇게 같이 살았고 자신도 같이
지금처럼 부모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로 알고 하는 대답 일 것이다. 아니면
결혼해서 다른 집에서 살게 되면 엄마와 아빠와 헤어진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아빠가 섭섭해 할까봐 눈치껏 답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아이고, 예쁜 우리 딸, 뽀뽀.’
하면서 입술을 내밀면 조그맣고 야들야들한 입술로 입을 맞추어 준다.
아이는 가만히 머물지 않고 하루하루 커간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갈 때쯤에 같은 말을 물으면
반응이 달라진다.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고 머뭇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인가부터 ‘아니,
어른이 되면 결혼해야 하니까 나도 결혼할거야.’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제는 영원토록 부모와
한집에서 같이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입술을 내밀면 마지못해 입을 맞춘다.
이제는 큰 만큼 아빠와 뽀뽀하는 것에 대해 뭔가 어색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딸과의 ‘뽀뽀’가 끝나는 날이 왔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2학년이나 3학년 때쯤인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다가 ‘뽀뽀’하면서 입술을 내밀었더니
거절한다. ‘싫어, 담배 냄새가 나서 싫어. 담배 끊으면 해줄께.’그냥 거절하면 미안하고 또
섭섭해 할까봐 거절한 이유까지 밝힌다.
딸과의 뽀뽀도 좋지만 이십년 넘게 피워 온 담배가 그리 쉽게 끊어질까? 그렇게 딸과의
‘뽀뽀’는 끝났다. 그만큼 딸이 큰 것이다.
막상 거절당했을 때의 섭섭함과 ‘어느새 이만큼 자랐구나’ 하는 대견함이 섞인묘한 기분.
글쎄 무엇으로 표현하면 적당할까?
(담배는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의 가을에 우연히 끊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날 시간을 내어 입학식에 참석했다. 3월 초라 아직은
날이 차고 간간이 부는 바람에 황토먼지가 눈에 들어와 성가셨지만 무엇이 그리 좋은 지
깔깔대며 딸은 친구들과 운동장 여기저기로 바빴다. 이윽고 시작되는 입학식 행사.
똑같은 제복을 입고 줄지어 서 있는 사이로 딸을 찾는다. 까만 교복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딸의 뒷모습. 잠깐의 순간에 낯설다.
아기는 사라지고 슬쩍 보이는 여자의 모습. 문득 딸과의 거리가 멀어 보인다.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꽃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 복효근, '목련꽃 브라자' 전문-
결혼 후 아내가 첫 친정 갔다 돌아오는 날이 생각난다.
장인어른과 집으로 -아내에게는 시집이지만- 돌아오는 차속에서 아내는 울었다.
그 순간에는 신혼의 달콤함 보다 이십여 년을 같이 부대끼며 같이 살았던 가족들을 떠난다는
섭섭함, 지금까지의 생활과의 단절,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밀려왔을 것이다.
장인어른의 눈시울도 이내 붉어졌다. 미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장인어른이 눈물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키워보니 이제야 알겠다, 그 마음을.
참새처럼 옆에서 재잘거리는 딸을 보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훗날의 어느 하루를 잠깐
생각했다.
그 날에, 장인어른처럼 딸의 손을 잡고 누군가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그 어느 날에 나는
눈시울만 적시고 말까 ?
-2007. 03.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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