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라 하면 원래의 뜻이야 따로 있지만 보통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를 일컫는다.
옛 선비들이 문인화의 주 소재로 삼아 그리거나 글을 지어 예찬할 만큼 특히
사랑한 것들이다.
‘사군자’는 각각의 특징이 있다 .
매화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이른 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고, 난은 번잡하지 않으면서 단출하게 허공을 휘어가는 잎의
자태가 일품이다.
‘난향천리(蘭香千里)’라는 말이 있듯이 향기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국화는 찬 서리를 이겨내고 늦은 가을까지 꽃을 피우며,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싱싱하고 푸른 잎을 유지한다.
옛 선비들이 이들을 사랑했던 이유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싱싱함을
유지하는 꿋꿋함과 고고함이 마치 선비들이 지향했던 군자와 닮아 있음이다.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순서는 각각 ‘춘,하,추,동’의 순서대로 나타낸다.
어제 모처럼 바람도 쐴 겸해서 화훼시장에 가서 작은 홍매화 한 그루를 사왔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의 실내에서 나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지라
몇 번의 상설임 끝이다.
오래 전 처음 맡아본 매화 향기가 마음에 깊게 남아 있어 '한 그루 키웠으면'
하는 욕망이 늘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면서 실내에서 매화 키우기가
어디 쉬운가?
매화분재라도 구할까 했었지만 철사에 옭매여 뒤틀린 형상을 보니 마치 내가
옭매인 기분이 들고 마음까지 뒤틀리는 듯하여 그만 두었다.
올해는 따뜻한 날이 일찍 시작된 데다 날도 3월 중순인지라 화훼단지에서
팔고 있는 대부분의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현관문과 중문 사이에 두었더니 곁에 있는 파키라의 녹색 이파리와 홍매화의
붉은 꽃잎이 서로 낯선 듯 하면서도 제법 어울린다.
‘낯선 어울림’ 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사군자’가 다 모였다.
내가 특별히 ‘사군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모이게 되었다.
매화는 몇 년 전에 치과에 갔을 때 소독약 냄새 대신 낯선 향의 냄새가 약하게
느껴져, 어디서 나는 향일까 하고 살펴 보다가 작은 항아리 화분에 꽂힌 매화
꽃가지에서 나는 향(梅香)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듯 마는 듯 그 애타는 향기라니....
기회가 닿으면 한 번 키워보리라 했었는데 이번에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난은 애호가들이 주변에 많이 늘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다가 집에 한두 개
있어도 괜찮아 보일 것 같아 하나씩 얻어 둔 것이 몇 개로 늘었다.
그 뒤 사무실의 난 하나가 온 공간에 향을 퍼뜨리는 바람에 난향의 황홀함에
빠지긴 했지만.
국화는 가을이면 많이들 사는 계절꽃이라 화분채로 몇 개 샀는데 관리 부실
탓인지 아무래도 말라 죽은 것 같고, 원예종으로 작게 개량된 '사계국화'라는 것
하나만 남았다. 대나무는 실내에서 키울만한 식물을 찾다가 '개운죽'이란 것이
실내에서키우기 쉽다고 해서 구입해서 유리병에 꽂아 두었다. 결국 ‘사군자’의
구색을 갖추게 된 셈이다.
'국화’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국화’라기엔 좀 멋쩍고 대나무이긴 하지만 작은
병에 담겨 있는 아열대산 수입품인 ‘개운죽'을 굳이 ‘사군자’의 반열에 놓을 수
있을까마는 전혀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으니 ‘사군자'가 있다고 우길 수는 있을
듯하다. 요새말로 ‘짝퉁’인 셈이다.
집주인이 '선비'가 아니니 어쩌면 내게 어울릴만한 ‘짝퉁'의 사군자가 오히려
제 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짝퉁’인들 어떠리, 참 멋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을.
요즈음에는 원예기술이 좋아서 제 철이 아니더라도 봄 과일이나 여름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제 철이 아닌 것을 쉽게 보고 먹을 수 있게 된 일이 마냥 좋아만 할 일인가는 제쳐두고
이런 기술과 교역의 발달로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사군자를 보는 일도 가능해졌다.
옛날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옛 선비들은 각각의 독특한 기품을 사랑하여 가까이 했다지만, 어쩌다 모였을 뿐
나는 그런 고상한 뜻으로 모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기왕에 우리 집에 모였으니
아무 탈 없이 나와 더불어 오래 오래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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