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다. 각 신문이나 방송의 월드컵 축구 기사가 점점 늘고 있다.
어젯밤에는 국가대표팀의 본선 경기 전의 마지막 평가전이 있었다. 본선에서의 좋은 경기를
기대하면서 밤늦도록 시청했는데 결과는 가나에게 3:1로 졌다. 비록 평가전이긴 하지만 아쉽다.
아침부터 멍하다. 공연히 싱숭생숭하기까지 하다.
부족한 잠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지난주에 갑자기 단행된 인사이동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한 탓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직장이란 곳에는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인사이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에 대한 인사와 정리 등으로 다소간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인사는
단순히 자리이동이 아닌 본인의 의사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여기서의 직장생활을 끝내야 하는 인사이어서
사무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들 착잡해 하고 있다. 월급쟁이의 비애를 느끼는 한편으로 가까운 장래에
닥칠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지금 몸담고 있는 직장에 첫발을 들여 놓은 후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자의로 타의로 떠나게
되는 동료들을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 중에는 가끔 소식이 들려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소식은 끊겼다.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 관계가 아니면 한 직장에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식 듣기란 쉽지 않다.
우연이 아니라면 만날 기회는 더더욱 드물다.
한용운님은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헤어진 뒤에 다시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별한 뒤에
쉽게 다시 만나거나 자주 볼 수 있다면 그 많은 이별의 노래나 시가 존재했을 것인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또 다시 쉽게 만날 수 있다면 구태여 이별을 노래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원한 이별을 향해 가도록 숙명 지워졌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이별 또한 적지 않다. ‘이별, 헤어짐, 떠나감’이란 말에는 뭔가 슬프고 안타깝고 애틋한 것이 담겨져 있다.
동료들과 열심히 어울리긴 하지만 성격상 사교적이지 못해서 이십여 년 간이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히 마음을 터놓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다. 특히나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는
터라 그저 모두가 직장 동료일 뿐 직장에서 사귄 친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소관계를 불문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을 때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이번처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는 사람을 바라볼
때는 더욱 그렇다. 늘 그렇듯이 간단히 악수하고 ‘굿바이’ 라고 웃으면서 헤어지는 일이 참 무겁다. 이 나이
되도록 아직 헤어지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나에게 늘 슬프게 다가온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서툴듯이 헤어지는 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살아오는 동안의 그 많은
헤어짐을 ‘용케도 잘 견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나면 헤어지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 몇 년 후에는 나도 이곳을 떠날
것이다. 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떠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과 상관없이 직장생활에는 ‘정년퇴직’이란 것도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동료들이 떠나는 일을 보는 일이 몇 번 더 반복될 것이다.
헤어지는 일에 익숙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훗날 내가 떠날 그때쯤, 떠나는 것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진 못해도 떠나는 일에는 익숙한 듯 갈 수 있으면 좋겠다.
- 2006. 06. 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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