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13번째 태풍인 산산이 다가오고 있다. 가을 태풍은 여름철의 태풍보다 위험하다고 하는데
피해를 주지 않고 잘 지나갔으면 한다.
‘안녕하십니까?’ ‘어, 오랜만이구나.’ 흔히 하는 인사이다. 넓은 부지의 땅 곳곳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하기 때문에 같은 직장이라도 한참동안이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직원들이 많이 있다. 방금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도 그렇다.
남자인데도 긴 생머리를 한다거나 말총머리에 머리띠를 하거나 해서 머리 모양을 특이하게
하고 다니는 직원이다. 옛날에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고
과거보다 직장 분위기가 부드러워 진 탓인지 특이한 머리 모양의 직원도 가끔 보인다
뒷머리가 조금 긴 듯하지만 오늘은 비교적 단정하게 깎은 머리다
'오늘은 단정하네. 그렇게 머리를 깎으니 인물도 훤하고 꼭 총각 같구나.’ 30대 중반 쯤의
직원이지만 미남형이고 어려보이는 얼굴이라 침 발린 소리만은 아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한 마디 거든다.
'총각 같기는요? *장님이 보시기에 그런 것이지, 야리야리한 옆에 있는 얘들을
보십시오. 저 얼굴이 총각 얼굴인지?’
그러고 보니 옆에 있는 총각 사원들의 얼굴을 보니 어려 보이고 확실히 말총머리 직원의
나이가 훨씬 들어 보인다.
그랬다. 나이가 든 눈으로 보니까 30대 중반도 어리게 보이고 총각같이 보인 것이었다.
만약 내가 20대의 나이였다면 그가 어떻게 보였을까? 기준점이 다른 눈으로 보니까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눈은 절대적인 기준점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때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눈의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만든 재미있는 그림들도 많다
자신의 눈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데도 우리는 자신만의 눈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고집하고 행동하는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기준점을 달리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 ‘눈높이’를 낮추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했던가?
유치원 교사는 5,6세의 눈으로,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생의 눈으로 중, 고등학교 교사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눈으로 아이들을 지도하지 않는다면 무척 힘들 것이다.
우리의 고유 미덕이었던 ‘노인 공경’이 사라지고 있다고들 한다.
옛날만큼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오히려 노인을 천시하는 세상이 되었다.
노인들도 과거에는 아기였고 어린애였으며 풋풋한 청춘이 있었음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노인이었다는 듯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
지금의 아기들도 머잖아 젊은이로 또 늙은이로 변해간다는 것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한창 때인 사람들의 눈높이에는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태여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보통사람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인다.’ 시저의 말이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려고 하는 것, 보통사람에게는 흔한 일이다.
세상에는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보기 싫어도 봐야하는 것들이 더 많은 법이다.
'보는 눈이 다르다' 는 말도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눈이 굳이 같을 필요는 없다. 같을 수도 없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태풍이 다가 오고 있는데도 조용하다. 단지 낮게 깔린 검은 구름들만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이 보다 행복해질 것이고 또한 얼마나 세상이 멋지게
변할 것인가?
자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아름답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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