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무렵 - 김남주 추석무렵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갈대 - 신경림 갈대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우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섣달 그믐밤 - 이기윤 섣달 그믐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웅크리고 가끔 마른 기침을 하신다 깜짝 잠이 들어버린 뒷마당 또래의 꾀양나무는 하얗게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입적(入寂) - 윤석산 입적(入寂) "이만 내려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로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꽃 -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가을예감 - 이의웅 가을예감 먼발치 너의 눈빛 마주치면 붉게 물들까 아직도 네게 다가설 수 없어 꽃무늬 같은 언약의 선물 가슴 언저리 묻어두고 억새밭 언덕길로 걸어가노라면 갈바람 속삭임 소리 들린다 운무 자욱한 산과 들 구비치는 강물 위에 지친 여름빛 홀로 넘실거리지만 언젠가 한줄기 바람으로 ..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만종(晩鐘) - 고찬규 만종(晩鐘) 구부린 등은 종이었다 해질녘, 구겨진 빛을 펼치는 종소리를 듣는다, 한 가닥 햇빛이 소중해지는 진펄밭 썰물 때면 패인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밋날로 캐내는, 한 생애 쪼그린 아낙의 등뒤로 끄덕이며 끄덕이며 나귀처럼 고개 숙이는 햇살 어둠이 찾아오면, 소리없이 밀물에 잠기는 종소리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귀천(歸天) - 천상병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
따뜻한 봄날 - 김형영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 시와 시조/향기가 있는 詩 2012.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