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26,7년 전쯤에
모친에게서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모친이 어딜 가시기 위해 열차를 탔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한 나이 드신 스님이 앉아 계셨다고 한다.
모친의 표현을 빌자면 지긋한 나이에 흰 수염의, 우리가 흔히 도인이라면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셨다고 한다.
모친이 불교 신자라 자연스레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을 터.....
살아가는 얘기와 불교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스님에게 들은 얘기 중의 하나를 모친이 해 주셨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게 상당히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스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담긴 뜻은 누구든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빈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큰그릇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 작은 그릇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
또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그릇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제각각의 타고난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있다.
아무리 큰그릇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그 곳에 쓰레기가 담긴다면
하찮은 그릇이 될 것이고, 작은 그릇일지라도 금을 담으면 그 그릇은
가치가 높고 빛나는 법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스님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모친에게 주셨다.
‘부처님께 많은 기도를 하라’고 하는 말씀과 함께.
그리고 얼마 후 모친이 그 목걸이를 내게 주셨고 지금까지 걸고 있다.
내가 군 생활하면서 군번줄을 착용할 때와 내 동생들이 대학입시를 치를 때
잠시 나를 벗어났을 뿐이다. 이제는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된 느낌도 든다.
어쩌다 모친이나 아내와 절에 갈 때가 있다. 여행중에 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때마다 법당에 들어가 같이 절을 하라고 재촉하지만 들어가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공감을 하지만 불교 신자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아서이다.
가끔 내키면 법당에 들어가 넙죽 절할 때도 없진 않다.
아무래도 교회나 성당보다 절에 갈 기회가 많지만 살아가다 보면 결혼식이나 장례식
기타의 일로 교회에도 성당에도 갈 기회가 생긴다. 법당에서 절을 잘 하지 않듯이
교회나 성당의 기도시간에는 슬그머니 빠져 나와 버린다.
아마 죄지은 일이 많아 스스로 부끄러운 탓일 것이다.
‘예수님 죄송합니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가끔 걱정도 된다.
절에 가서도 부처님께 깍듯하지 못하고 교회나 성당에서도
예수님께 깍듯하지 못하니 죽은 뒤에 극락이나 천당에 못 갈까봐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위안도 해본다.
‘절에 가서도 몇 번은 절을 했으니 부처님도 좀 봐줄 것이고
교회나 성당에서도 예수님께 존경심을 가지고 눈감고
잘못을 반성한 적이 있으니 정상참작을 조금은 해 주시겠지‘라고.
( 중학교는 불교재단, 고등학교는 천주교 재단 학교를 다녔으니
어쩌면 그 부분도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종교시간에 졸긴 했지만)
누구든지 많든 적든 금으로만 담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 듯 하다.
내 그릇의 크기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크기에 관계없이 쓰레기가 많이 담겨 있을 것 같아 걱정된다.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반짝임을 느낄 때도 있으니 적은 양의 금일 망정
모여 있을 것 같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금과 쓰레기가 적당히
섞여 있을 것 같다.
금과 쓰레기의 비율이 차이가 나겠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지금 금을 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쓰레기를 담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고의든 아니든간에 항상 금을 담을 수 있는 행동만 할 수 없는 것이
범부의 일상이고, 나 자신이 그 범주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인 까닭이다.
대부분의 일상이 '그릇에 무엇을 담을까? '하는 의식조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래도 가끔은 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행동을 할 때
슬그머니 목걸이를 벗어 잠시 호주머니에 피신(?)시키는 경우도 있다.
목에 걸고 있으나 호주머니에 있으나 무엇이 달라질까만
왠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신경이 쓰여서..
- 2001. 11.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