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길을 나서다

가도 가도 천리길

동솔밭 촌장 2012. 4. 1. 12:49

 

 

  전남의 고흥에 이종사촌 누나가 살고 있다.  서울에서 살다가 10년쯤 전에  내려왔다.

  자식으로 조카딸 하나가 있는데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부부만 단촐하게 지내고 있다.

  가끔 전화를 하면 '다녀가라'고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한번 가기가 쉽지 않았다.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이란  영화도 있었지만 길이 멀어 마음도 먼 것인지.......

  너무 오래 핑계만 댄 것 같아 11월 중에 한 번 갈 것을 약속을 했고

  이제 그 약속도 지키고 누나도 볼겸해서 아내와 길을 나섰다.

  부산에서의 출발도 늦었지만 주말이어서인지 생각보다 고속도로가 막혔다.

  휴게소에서의 늦은 점심을 먹은 시간까지 합쳐 5시간 정도 걸려 석양빛이 들판에서 

  사그러질 때쯤 도착했다.

 

 

   * 고흥-녹동항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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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그런데 날을 잘못 잡았다.

  며칠전에 자형과 누나가 발정기의 숫사슴 -작은 황소 크기만한 엘크라고 하는 큰사슴- 에게

  공격을 당해  자형은 팔에 기브스를 했고 누나는 갈비뼈에 부상을 당했단다.

  다행히 뿔은 잘린 상태라 치명상을 피했지만 까딱했으면 큰 일 날뻔했다.

  엘크의 발굽에 살아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순하게만 생각했던 사슴인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출발 전날 전화했을 때만 해도 아무 말 없더니.....

  '다쳤다' 고 하면 안올 것 같아 일부러 숨겼단다.  그것 참, 우리가 무슨 큰 손님이라고..

  사위와 딸이 전날 내려와 있었다.  딸에게도 사고가 난 며칠 뒤에 알렸다고  했다. 

  그애들 보기가 민망했다.

 

  다음날 일찍 돌아오려고 했더니 기어코 붙든다. 그리고 가까이에 소록도가 있으니 가자고

  재촉한다.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누나집에서 차로 5분 정도 걸려 녹동항에 도착했다. 300미터쯤 바다 저편에 작은 섬이 보인다.

  소록도다.

  왼쪽 작은 건물이 보이는 곳이 소록도 선착장이다.  승용차 10대정도 실을 수 있는 크기의

  카페리로 건너는데, 약 10분정도 걸렸다.

 

 

  * 녹동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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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동항에서 본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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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해서 차를 몰고 가는데 입구에서 차를 세운다. '보러 왔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바로 들여 보내준다. 들어가는 절차상의 문답치고는 생소하다.

몇 백미터 들어갔더니 주차장이 보인다. 일반인의 차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실제적인 요양소의

경계다.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 슬프고 아픈 그리고 건널 수 없는 선. 찬바람이 눈을 괴롭힌다.

 

*수탄장 안내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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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염을 염려해서 아이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들은 바람을 안고 마주 섰다고 한다.

 날이 제법 차다. 걷는 길에 낙엽이 하나씩 떨어진다.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주치는 그 사람들도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을 지 모른다.

 어쩌면 이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한가지씩 병을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다만 노출되지 않고 감추는 것일 뿐이 아닐까?

 별다른 표시가 없는 회색빛 건물이 보인다. 그들을 위한 병원이다.

 아니 우리 모두의 병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이 전부 하나의 큰 병원인 지도 모른다.

 

 *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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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아픔이 배어 있다. 요양소내를 둘러보니 선입견만 아니라면 잘 가꾸어진 공원 같은 장소이다.

 오랜 풍상의 나무들과 큰 정원수들, 그들의 눈물과 피로 자랐을 것이다.

 지금은 따로 전문적으로 조경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 희생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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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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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원장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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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은 지워지고 안내판만이 남아 옛 일을 말해줄 뿐.

 전시관에는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일본인의 기록도 있었다. 하지만 좋고 기쁜 기억보다 

 아프고 힘든 일에 대한 기억이 깊고 오래 가는 법.

 그 당시의 이곳에서 그들은 사람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만 해도 길거리에서 동냥을 얻으러 다니는 그들을 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작대기로 돌로 맞으며 이리 저리 쫓기며 울던 그 모습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섭고 두려워서 '얼른 다른 동네로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 십년 전의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아픈 기억이다

 '여기에 봉사하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천사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무지 그럴 자신이

 생기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누나의 말이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야 천사이던가? 누나의 말에 '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다' 몇 번을

 되뇌었다.  

 여고시절 아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그들에게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봉사하러  간 적이

 한 번 있었단다. 비록 학교생활의 일부였다지만 그곳을 선택한 용기에 속으로 놀랐다.

 '단 한 번이라도 천사였던 아내와 살고 있구나' 새삼 아내를 쳐다 보았다.

 솔직히 나는 한 번이라도 그럴 자신이 없다.  그들의 애환을 모아두었던 전시관의 출구에

 여러 종류의 지폐들이 낙엽처럼 뒤엉켜 있는 작은 모금함이 있었는데  그저 그  모금함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뿐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 마리아상과 예수상 (예수상은 사진 좌측의 정원수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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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시 '전라도 길- 부제: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전문'

 

 보리피리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 시인의 詩碑가 있었다. '詩碑'란 세워져 있는 것인데

 누워있으니 '碑'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詩石'이랄 수도 없고.

 붉은 황톳길을 숨막히며 갈 일이 더는 없으리.

 보리피리 불면서 편안하게 누워 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 한하운 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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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바이가 서더니 한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그들 중의 한사람이다. 완치된 사람인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었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둘러 보러 왔어요?'  '예'

 '많이들 데리고 오시지, 세사람만 왔어요?' '예, 나는 가까이 살고, 부산사는 동생이 와서 안내해

 주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천천히 둘러 보세요'

 순간적으로 얼떨떨 했다. ' 봉사하는 사람들외에 원근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관광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곳인데 마치 그런 곳에서의 대화 같아 순간적으로 멍했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카페리를 이용하여 차로 수탄장 입구까지 갈 수 있지만 버스로 오는

 사람들은 녹동항에서 하차하여 페리로 선착장에서 하선한 다음에 걸어 들어가게 된다.

 육지와 소록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곧 완공된다고 한다.

 연륙교가 완공되면 버스를 탄 채로 이동하게 될 터이니 카 페리를 이용하는 외부객들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외부사람이 많이 드나드는데 다리가 완공된 후에는 이곳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이 완치되어 다 떠나가고 요양이나 치료하기 위해 올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 먼 훗날에, 삶이 힘들고 고달파서 마음에 병든 이들이 있어 병을 다스릴 곳이 필요하다면

 이곳이 그런  쉼터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소록도 연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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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에서의 1시간 남짓한 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슴에게도 공격당해 죽을 수 있는 약한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가도 가도 천리길.....

 부산에서 소록도 까지 오백리, 소록도에서 부산까지 오백리. 천리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