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와 달걀
외갓집이란 단어는 엄격하게 말하면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다. '집'이란 말을 뺀 '외가'가 맞다.
'역전 앞'이나 '처갓집'과 같이 대표적으로 잘못 쓰고 있는 말 중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문법적으로 어떠하든
나에겐 '외가'란 말보다 '외갓집'이란 말이 훨씬 정감이 가고 자연스럽다.
나의 외갓집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지묘'라는 곳이다. 지금은 대구광역시에 편입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이었다.
참고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 근방의 공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지묘동 일대는 후삼국 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하게 싸웠던 유명한 싸움터였다.
이 싸움에서 왕건이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 장군의 사당이 외갓집 앞의
개울 건너에 있다. 사당 외에도 '왕산, 독좌암, 나발고개, 파군재' 등 당시의 전투로 인해 생겨난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대구 근교의 마을이었지만 어릴 때의 외가동네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외갓집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숙부모,
외사촌 형,누나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가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다 있는 셈이었다.
방학 때면 늘 외가에 며칠씩 머물곤 했다. 여름방학때는 숙제에 틀림없이 들어있는 '곤충채집'을 위해 잠자리채 하나
들고. 가끔 외사촌형과 그 일당(?)들의 꽁무니를 따라 악동행사에 동참하기도 하고 소에게 풀 먹이러 근처 산에
따라가기도 했다.
사립문 입구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방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과 바둑을 두시면서 소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것이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바둑돌이다.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한 조개류의 조각들이
바둑돌이었다.
나무 밑둥을 잘라 만든 투박한 바둑판 위에서 검은 색의 조개 조각과 밝은 색의 조개 조각이 치열한 해전을 벌인 셈이다.
안방에는 외할머니가 지내는 방이다. 외가에 머물 때는 주로 외할머니가 지내는 안방에서 잤다.
안방에는 통나무로 만든 이불을 얹어두는 나무시렁이 있었는데 낮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눈에 불이 나도록
부딪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면서 '이노무 손아, 조심 안하고' 하셨다.
그 마을사람들이 두 분을 부르는 공식호칭은 '호동 할배, 호동 할매'였다.
외할아버지는 본관이 경주인 최씨이고, 외할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호동'이란 택호의 연원은 모른다.
보통 친정이나 고향등의 지명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으니 아마도 '호동'이란 택호도 그랬을 것이다.
안방에는 성역이 있었다. 무릎걸음을 해야하는 작은 다락방이다. 그 곳에는 수시로 사용되지 않는 여러 가지의 물건들이
있었지만 과자류와 곶감 또는 철 마다의 과일 등이 심심찮게 있었다.
손님들이 다녀갈 때 외할머니께서 드시라고 주고 간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바람에 다락방은 묵시적으로 외할머니의
고유영역이 되었다. 그 성역에 수시로 임의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친손, 외손을 불문하고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외할머니께서 '다락에 가마(가면) 무엇 무엇이 이시니(있으니) 꺼내 무라(먹어라)'가
일종의 출입허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이 안 먹는 편인데다 군것질도 즐기지 않은 탓에 외할머니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무시로 출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외할머니가 '다락에 가면 00이 있으니 꺼내 먹어라' 재촉하셔도 내가 잘 먹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노무 자석아 좀 무라, 그것 참' 하시면서 혀를 차신다. 외할머니가 어째서 나에게만 특권을 주셨는지 모르겠다.
잠시 외할머니의 얘기 한가지를 하자면,
외할머니가 모친을 낳으셨을 때의 연세가 마흔 여섯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도 老産 중의 老産인데 그 당시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사위와 며느리를 본 외할머니로서는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의 귀여움보다
창피스러움이 앞섰을 것이다. 결국 새댁이었던 외숙모가 거의 키웠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3대 독자였는데 외할머니가 시집와서 처음 낳은 자식이 딸이다. 그것도 쌍둥이로.
그 때의 외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 지? 다행히 그 후 외삼촌들이 여럿 태어났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도 가끔 그 생각하면 외할머니께는 죄송스럽지만 웃음이 난다. 3대 독자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가 처음 낳은 자식이
딸 쌍둥이.
나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구' 라고 말한다. 본적지도 그렇게 되어있고 대구에서 여섯 살 때부터 줄곧 성장을
했으니까. 하지만 태어난 곳은 전방지역인 경기도 양주군의 작은 마을인 신산리라고 하는 곳이다. 부친이 군인이어서
3형제가 모두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외할머니가 받았다고 한다.
모친이 결혼한지 햇수로 5년만에 내가 태어났는데, 내가 태어날 때 외할머니의 연세가 칠순을 코앞에 두셨으니 당시에는
적은 연세가 아니다. 그런 시골노인이 주소 하나와 부친이 근무하던 부대이름만 달랑 들고 딸의 해산을 위해
전방이라는 곳으로의 초행길에 나섰으니 얼마나 고초를 겪었겠는가.
전쟁이 끝난 지 4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에 버스로, 열차로 또 버스로 갈아타면서 묻고 물어 서울 근방에 도착했으나
12월의 짧은 하루가 저물고 말았다.
57년도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아는 길이고 젊은 사람이라 해도 하루에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딸에게 줄려고 양손에 들고 가신 짐의 무게에 더해 초행의 장거리 여행에 지친 시골노인이 낯선 곳에서 밤을 맞게 되었으니
암담하셨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지나가는 군인에게 길을 묻다가 그의 도움으로 군부대 전화로 부친에게 연락이 되었다. 마침 그 군인이
외할머니가 사시는 곳이 자기의 고향과 크게 멀지 않은 곳임을 알고 마을어른으로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고 했다.
말은 안 하셨지만 늦게 낳은 막내딸을 엄마로서 제대로 품에 안아주지 못한 미안함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그 먼 길의 고초를
감내하고 또 외손자를 챙긴 것인지도 모른다.
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집에 가끔 주무시고 가신 적이 있긴 하지만 외할머니가 다녀가신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쯤 일 것 같은데 한 번은 꽤 오래 지내신 적이 있다. 아마 한 달 남짓일 것이다.
하루는 밖에서 놀다가 대문에 들어서는데 마당 한쪽 구석에서 외할머니가 당황하면서 황급히 무엇을 삼키시는 것 같았다.
바닥을 보니 달걀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날 달걀 하나를 드신 것이었다.
'어, 할매 달걀 묵었네(먹었네), 와 몰래 묵노?'
'안 무겄다'
'묵었잖아, 와 안묵었다카노?'
몇 번의 비슷한 말이 오가던 중에 화를 내시면서 '그래, 내가 입맛도 없고 해서 하나 묵었다 이노무 손아' 하신다.
화내시는 바람에 나도 같이 목소리를 높였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리신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것이 달걀이지만
그 때는 조금 고급에 속한 먹거리였다. 어린 마음이지만 달걀 하나가 아까워서이기 보다 몰래 드시는 것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래도 얼마나 당황하고 섭섭하셨을 지?
그랬던 내가 중학교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무슨 마음에선지 외할머니께 선물을 하나 사서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께서는 담배를 즐기셨는데 시골 노인들이 그러하듯이 긴 대나무 담뱃대에 가루 담배를 꾹꾹 눌러
많이 피우셨다.
수학여행 때 쓸 용돈의 상당부분을 덜어내어 고급스러워 보이는 담뱃대를 하나 샀다.
외손자의 선물에 외할머니께서 오는 사람마다 자랑을 해서 '호동할매 외손주가 담뱃대 선물을 했다'는 말이 작은 시골
동네에 다 퍼졌다.
외가에 갈 때마다 동네 어른들이 '니가 느그 할매 담뱃대 사드맀다면서, 허허참' 하는 말을 듣고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가끔 외갓집에 가서 보면 여전히 옛날 쓰던 담뱃대를 물고 계셨다.
'할매, 와 내가 사준 담뱃대 안쓰노?'
마침 옆에 있던 외숙모께서 대신 답변을 하신다.
'느그(너의) 할매가 그기(그것이) 아까워서 잘 안쓴다'
'아이고 할매, 아깝기는 뭐가 아깝노?'
그랬다. 한 두 번 사용하시다가 외손주가 사 준 담뱃대를 쓰기가 아까워서 무슨 꿀단지처럼 애지중지 벽에 걸어만 두신 것이었다.
그 뒤 외할머니는 내가 있을 때는 그 담뱃대로 피우시고 내가 가고 나면 옛 담뱃대로 피우셨다.
돌아가시는 날에도 벽에 걸려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내 나이 스물 둘이었던 78년도의 가을에 외할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것은 잘 안 드시고 바나나 우유만 겨우 드신다는 말을 듣고 가끔 그것을 사들고 찾아갔다.
아마 약간 단맛이 있어서 생우유보다 마시기 편하셨던 모양이다.
그 즈음에 아르바이트로 저녁시간에 학생 하나를 가르쳤는데 아르바이트비를 받고 '이번 주말에 또 가봐야겠다' 고 하다가
내친 김에 다음날 점심때 조금 지나서 외가로 향했다. 막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쌍둥이 이모중의 한 분인 서울 사시던 큰 이모가 내려오셨다가 외할머니가 편찮으신 것을 보고 머물러 계셨는데 큰이모
무릎에 머리를 얹고 계셨다.
큰이모가 내가 왔다고 외할머니 귀에 말하니까 힘없이 눈을 뜨시더니 다시 감으셨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알아보셨는지 아닌지.
그 해 초에 모친이 '내가 어디서 알아봤는데 외할머니가 아흔을 못 넘긴다고 하더라' 고 하셨다.
그 때는 예사로 생각했는데 그 날 보았을 때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져간 우유를 이모가 숟가락으로 입에 넣어드렸더니 겨우 두 세 모금 삼키시더니 다시 머리를 누이셨다.
딱히 더 할 일도 없고 해서 잠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동생이 '조금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고 한다. 외가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었다.
'그럴 리가? 아직은 아닌데' 하면서 선걸음으로 다시 외가로 갔다.
겨울초입에 들어선 12월 초, 외할머니의 연세 여든 아홉이었다. 슬프다거나 눈물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돌아가실 그 시간에 외가에는 외할아버지와 외숙모, 큰이모만이 계셨다. 설마 그 날 돌아가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친손주, 외손주를 막론하고 많은 손주들이 있지만 외할머니가 희미하게나마 마지막으로 보셨던 손주가 내가
된 셈이었다. 내가 드린 바나나 우유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음식이었고 먼길 가실 때의 첫 요기가 되어버렸다.
당시에 내게 하신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아직 생생하다.
'고놈의 할마시 내가 안방으로 건너가기도 전에 가뿟다(가 버렸다)'
그 말씀 끝의 외할아버지의 쓸쓸해하시는 얼굴. 70년을 함께 살아온 짝의 죽음을 맞았으니 오죽했겠는가?
70년의 짝을 먼저 보내어서 그런지 외할아버지는 이듬해 늦봄에 외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그날 밤 사랑방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안방에서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나오시더니 사랑방 옆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시길래 내가 말했다.
'할매,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안되었는데 왜 가셨습니까?' 아무 말도 않고 사립문 쪽으로 가시더니 홀연 사라지셨다.
출상하는 날 영구차가 굵은 돌이 박혀있는 파군재를 덜컹거리며 넘어가기 시작할 때 '이 고개 넘으면 할매가 다시는
여기 못 넘어 오는데' 하는 생각에 봇물이 터진 듯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가슴에 꽉 맺힌 듯 했다.
주체할 수도 없는, 하고 싶지도 않는 눈물. 고개를 넘은 한참 후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여태까지도 그 때만큼 운 적이 없다.
외갓집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씨암탉이 알을 낳으면 그 알은 거의 예외없이 외할머니의 손에 건네진다. 필요할 때
외할머니가 내놓기 전까지 다락에 얌전히 보관되는 것이다.
내가 잘 안 먹으니까 과자나 홍시같은 과일을 손수 꺼내시고는 먹기를 재촉하셨다.
특히 달걀을 꺼냈을 때는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외숙모가 알까봐 특히 재촉이
심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씨암탉의 달걀을 단속하시던 분이 같이 사는 친손자는 생각 않고 시골에서는
귀하게 생각하는 달걀을 외손자에게만 선뜻 주는 모습을 며느리인 외숙모에게 보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기 싫다고 투덜대는 외손자가 얼마나 미웠을 것인가. 결국 내가 먹는 것이라고는
외할머니의 욕이었다.
안방에 계실 때는 식지도 않은 달걀을 건네 받던 분이 딸네집에 와서 그깟 달걀 하나 드시는 것도 조심스러워
누가 볼세라 하신 그 일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다.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 마음이지만 '할머니가 달걀이 드시고 싶은 것 같구나, 하나 더 드려야지' 라는 생각을 왜 못했는지,
홍시라도 주시거나 과자라도 꺼내주시면 왜 얼른 받아먹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집으로'라는 외할머니의 손자에 대한 사랑을 소재로 한 인기 있는 영화가 있었다.
약간의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데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6년이나 지났는데도 희석되지 않는
감정이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시골마을이 대구시로 편입이 되어 외가 동네도 많이 바뀌어 버렸다. 초가지붕의 집들은 간 곳이 없고
넓은 도로와 거의 말라버린 개울만이 남아있다. 덜커덩거리며 지나가던 파군재의 고갯길은 아스팔트가 덮혀 버렸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외가의 정취와 어릴 때의 기억을 그곳에서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만큼 변해버렸다.
외갓집도 외사촌 형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리운 것들
앞산 중턱의
띄엄띄엄
붉은 진달래
황톳길의
털거덕털거덕
소 달구지
개울가의
타닥타닥
빨래소리
앞마당의
꼬꼬댁 꼬꼬댁
암탉들과 장닭
담벼락 풀꽃 위로
나폴나폴
노랑나비 한 마리
툇마루 위의
햇볕 한 조각
졸음 한 조각
결혼하고 난 뒤에 집사람을 데리고 외할머니 산소에 갔었다. 그 뒤 몇 년간 추석 때마다 또는 근방을 지나는 길에
산소에 들렀는데 요 몇 년 동안에는 전혀 가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을 내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살아 생전이나 돌아가신 뒤에나 여전히 못난 외손자인 것 같다.
이번 추석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녀와야겠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바나나 우유와 달걀이라도 몇 개 들고 가서 드릴 생각이다
- 2004. 07.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