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記
날짜 : 모년 모월 모일
날씨 : 오늘은 찬 기운이 잠시 물러나고 햇살이 포근하더이다
하루를 멍하니 지냈어요
마음은 당신 찾아 길 떠나고
책상 앞에 빈껍데기만이 앉아
숨쉬듯이 종일 담배만 피웠으니까요
술에만 사람이 취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담배연기에도 취합니다 그려
사무실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놓은 몸뚱아리를 뒤로하고
나는 당신이 걸어갔을 것 같은 길을 따라 갔습니다
남녘이라 아직 나뭇가지에는
노랗게 빨갛게 물든 채 남아있는 잎들도 있었어요
산길을 걷노라니 발밑에선 낙엽이 밟히고
가끔 가지사이로 바람도 불었지요
젖어 있는 낙엽을 보았어요
어쩌면 미처 손수건으로 닦지 못해 떨어뜨린
당신의 눈물에 젖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젖은 낙엽을 주워선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어요
혹시라도 내가 말릴 수 있을까 해서요
갑자기 작은 새 두 마리가 포로롱 날아갑니다
아마 어디에선가 숨어서 나를 보고 있다가
되돌아 온 것을 보고 놀랐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 새들을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새가 날아간 쪽으로 느릿느릿 해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공연히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날려고 하더군요
남자란 함부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
수없이 들었는데도 눈에 고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내 눈물샘이 너무 작아서 넘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난 것이겠지요
해가 참 짧아졌어요
잠시 머뭇거린 사이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무척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았던 것 같기도 한 하루였습니다
가끔 우리 딸이 일기를 적은 후 끄트머리에 이렇게 써 놓더군요
오늘 일기 끝.